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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칼럼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다”

할머니와 시인

 

어떤 순결한 영혼은 먹지처럼 묻어난다.

 

가령 오늘 점심에는 사천 원짜리 추어탕을 먹고 천 원짜리 거슬러 오다가, 횡단보도 앞에서 까박까박 조는 남루의 할머니에게 ‘이것 가지고 점심 사 드세요’ 억지로 받게 했더니, 횡단보도 다 건너가는데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다’ 기어코 돌려주셨다. 아, 그걸 점심 값이라고 내놓은 내가 그제서야 부끄러운 줄 알았지만, 할머니는 섭섭다거나 언짢은 기색 아니었다. 어릴 때 먹지를 가지고 놀 때처럼, 내 손이 참 더러워 보였다.  
 - 이성복 시인(1952~) ‘아, 그걸 점심값이라고’ 시 전문

 

배부르게 추어탕을 먹고 돌아오는 길, 끼니를 거르고 길가에서 졸고 있는 할머니가 눈에 들어온다. 자기 배가 고플 때는 남의 허기가 눈에 들어오지 않지만, 자신의 배가 부르면 비로소 남의 허기가 눈에 들어오는 법. 마침 주머니에서 걸리적거리는 잔돈 천 원을 할머니 손에 쥐어준다. 허기진 할머니에게 점심 값을 건넬 줄 아는 마음 씀씀이 덕분에 추어탕 한 사발 가득 채워진 이성복 시인의 배도 더 따스해졌을 것이다. 

 

그러나, 할머니가 무거운 몸을 이끌고 시인을 쫓아와서 그 천 원짜리 한 장을 기어코 되돌려주었을 때 시인은 비로소 자신의 손이 부끄러워진다. 남의 허기를 달래기 위해 내놓은 게 기껏 자신에게는 쓸모 없는 천 원 한 장이었다는 것, 그 초라한 지폐 한 장 조차도 할머니에게는 차마 공짜로 받을 수 없는 큰 돈이었다는 것. 내 손을 바라본다. 시인의 손이 더러워 보였듯이, 내 손도 지저분하다. 손씻기에 그렇게 신경을 썼는데도 영 지저분하다. 

 

시인이 긴 역사를 노래하고, 뜨겁고 회한 많은 사랑을 노래할 수도 있지만, 이성복 시인이 주로 노래하는 것은 민망하고 부끄럽고, 죄 많이 짓는 비루한 일상이다. 어쨌든 역사도, 사랑도, 그리움도 그 사소한 일상이 포개져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시인이 포착한 남루한 일상 한 조각이 오늘처럼 배 부른 오후에는 유독 껄끄럽다. 잠깐만 정신을 차리고 연구실 창 밖을 바라보면, 세상 돌아가는 일이 아찔할 정도로 불합리하다.

 

이유야 어쨌든 누군가는 굶주리고, 누군가는 배가 부르다는 것. 그리고, 이 세상에서 나는 배고픈 쪽보다는 배부른 쪽에 있다는 것. 내가 거대한 종합병원에서 바쁘게 일하고 일주일에 며칠씩 야근을 한다는 사실로 나의 배부름이 정당화될 수는 없는 것이다. 곰곰이 따져보면 참 부끄러운 일이 많은데, 사람이 매일을 그런 마음으로 살아갈 수는 없으므로 세상의 불공정으로부터 눈 돌릴 핑계를 찾게 된다. 어쨌든 나는 오늘 저녁에 어느 호텔 레스토랑에서 몇 만원짜리 스테이크에 칼질을 할 예정이므로. 

 

먹지 얘기를 좀 해 보겠다.

 

요즘이야 필요한 서류는 프린터로 몇 장씩 출력 할 수 있으므로 먹지를 쓸 일이 좀처럼 없지만, 아날로그 시대의 사무실에서는 먹지가 필수품이었다. 어린 시절의 나에게도 먹지는 꽤나 요긴한 물건이었다. 국민학교 1학년 때, 국어 교과서 10번 베껴쓰기 같은 숙제가 있었는데, 철수와 영이가 바둑이랑 놀러 다닌 일을 10번씩 반복해서 적는 게 고역이었던 나는 먹지를 이용해서 숙제를 해 치우곤 했다. 이때 주의할 것은 먹지 때문에 노트가 지저분해지지 않도록, 글씨 쓰는 손을 노트에서 살짝 공중부양시켜서 글씨를 꾹꾹 눌러 쓰는 것. 그렇게 먹지를 세 장, 네 장 겹쳐서 한번에 노트 몇 장을 해결하다가 어느 날 결국은 선생님께 들켜서 호되게 두들겨 맞았었다.

 

배부른 오후에 먹지로 더러워진 어린 시절의 손이 떠오르는 것은 시인이 마주쳤던 할머니뿐만 아니라 부끄럼 잘 타는 시인의 영혼이 또한 먹지처럼 내 손에 묻어나기 때문이다. 부끄러움을 느끼기 위해 반드시 시인처럼 예민할 필요는 없을 텐데, 시대는 자꾸 부끄러워할 필요가 없다고, 그냥 적당히 뻔뻔해져도 된다고 말한다. 부끄러워할 줄 모르는 마음을 부끄러워하면, 결국 부끄러움이 없을 것이다’라는 맹자의 가르침이 새삼 귀하게 느껴지는 시절, ‘미안시루와서 이거 안 받을랩니다’라는 할머니의 목소리가 자꾸만 귓가에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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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경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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