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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칼럼

슈베르트의 안경, 꿈, 그리고 콤플렉스

“음악은 여기에 빛나는 자산을, 아니 더 크게 빛날 수도 있었을 희망을 묻었다.”

 

비엔나 북서쪽 외곽 바링(Währing) 공원묘지. 31세의 나이에 세상을 떠난 프란츠 슈베르트(1797~1828)에게 그의 절친 시인이 남긴 묘비명이다.

꽃을 다 피우지 못하고 요절한 비련의 운명. 왜 슈베르트는 그리도 빨리 인생을 마감해야 했을까? 603곡의 가곡, 10개의 교향곡, 21개의 피아노 소나타, 15개의 현악4중주.

 

31세에 절명한 한 사람이 모두 작곡했다고 믿기엔 상상조차 어려운 1,000여 곡의 작품을 숨가쁘게 써 남겨놓고 그는 세상과 안타까이 작별했다.

슈베르트는 어떤 사람이었을까? 우리는 대개 슈베르트라 하면 연가곡집 ‘겨울나그네’의 CD 쟈켓에 나올법한, 코트 깃을 올려 세우고 어깨를 웅크린 채 스산한 거리를 쓸쓸히 걸어가는, 뭔가 외롭고 가련해 보이는 한 남자의 뒷모습을 떠올린다. 실제 그의 모습은 어떠했을까? 뒤의 초상화들을 살펴보자.
 

[그림1] 빌헬름 리더의 1875년도 작품, [그림2] 조세프 텔처의 1827년도 작품


두 초상화 모두 슈베르트와 잘 알고 지내던 비엔나의 동년배 친구 예술가들이 그린 작품이다. [그림1]은 빌헬름 리더의 1875년도 작품, [그림2]는 조세프 텔처의 1827년도 작품. [그림1]의 슈베르트가 훨씬 잘생겼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림2] 스케치의 맨 오른쪽 얼굴처럼, 잘생겼다거나 매력적이라고 하기는 어려운 외모였단다. 아니 좀 더 솔직하자면 아주 볼품없는 추남이었단다. 키는 157cm, 군대에 갈 수도 없는 작은 키, 그래도 모차르트보다는 7cm 더 크긴 했다. 볼 살이 통통한 달덩어리형 얼굴, 이마는 넓은 앞짱구형, 턱은 각지고 가운데가 쪼개져 친구들이 놀렸다. 땅딸막한 체형 탓에 학창시절 별명이 ‘꼬마 버섯(Schwammerl)’이었다.

 

그는 늘 동그란 금속테 안경을 쓰고 있었다. 근시가 심해 잘 안보인 탓도 있었지만 그는 잠잘 때도 안경을 벗지 않았다. 
 

한 친구가 이유를 물으니까 꿈꿀 때 꿈이 잘 보여서라고 말했다. 자다가도 악상이 문득 떠오르면 바로 일어나 오선지에 옮기기 위해서였다고도 한다. 아마 더듬더듬 안경 찾느라 낭패를 본 경험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슈베르트의 안경은 지금도 비엔나의 슈베르트 출생기념관에 전시되어있다. 눈앞에 렌즈 위치를 고정시켜 ‘항상’ 안경을 쓰고 다닐 수 있도록 하는 개념이 처음 소개된 것이 1797년, 그 전에는 눈 앞에 잠시 대서 쓰는 용도였다.

 

이 이후에 귀에 걸 수 있는 안경테가 보급되기 시작했고 귀 뒷부분을 곡선으로 굽힌 지금의 형태는 1890년이 되어서야 가능했다. 렌즈의 오목한 면으로 보면 시력이 나아질 수 있다는 개념이 1804년에서야 알려졌고 이 이후에 비로소 오목렌즈를 이용한 근시안경이 만들어지기 시작했다. 이런 정황을 감안하면 슈베르트는 그야말로 얼리어답터인 셈이다. 근시안경이 세상에 나오자마자 사용하기 시작하였으니 말이다. 그만큼 눈이 많이 나빠 불편이 심했다는 추측도 가능하다. 그런데 당시로서는 안경을 ‘쓰고 다닌다’고 하는 것은 자신이 신체적 약자임을 내놓고 알리고 다니는 일이기도 했다. 마치 청각장애자가 큰 보청기를 사용할 때처럼 말이다. 베토벤도 마리 앙투아네트도 안경을 사용했지만 공개적인 자리에서는 절대 쓰지 않았다. 슈베르트에게 안경을 ‘쓰고 다녀야’ 함은 안 그래도 비호감형의 외모에 더 부채질을 하는 것은 아니었을까? 여러 면에서 그의 외모는 평생에 걸친 무거운 콤플렉스였다.

 

슈베르트에게 또 하나의 콤플렉스는 그를 때이른 죽음에 이르게 한 질병이었다. 매독. 1822년 말 그는 매독균에 감염되었다.

 

1823년 2월 처음 증상을 발견했다. 5~6월에는 얼굴, 두피를 포함한 전신 피부에 발진이 생겼다. 다음해 4월에는 관절통, 오른 팔의 통증. 1825년 초까지 입원, 퇴원을 반복했다. 수은연고를 온 몸에 바르는 치료도 받았다. 당시 매독은 매우 흔해서(18세기 초 프랑스 인구의 10~20%가 매독감염자였다는 보고가 있다) 그 증상과 예후를 의사뿐만 아니라 일반인들도 익히 알고 있던 터였다.

 

슈베르트는 자신의 증상이 치료될 수 없음을 알았고 죽음을 예상했다. 같은 병을 앓았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죽어가는 지를 보았고 자신은 이제 단지 20대 후반. 그는 남은 생을 오로지 작곡에만 매달렸다. 입에 담는 것 조차 금기시되던 병, 피할 수 없는 사회적 스티그마. 일기장에 이렇게 적었다. “나는 내 병이 나아질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난 이대로도 괜찮다. 난 단지 작곡하기 위해 이 세상에 태어났으니까.” 엄청난 열정을 쏟아 부으며 비범한 말년의 걸작, 9번 C장조 교향곡, C장조 현악5중주, 3개의 마지막 피아노 소나타를 완성한 슈베르트는 1828년 11월19일 32세를 2달 남긴 채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영원한 겨울여행을 떠났다.


‘겨울나그네(겨울여행) D. 911’의 이런 ‘밤인사(Gute Nacht)’를 남기고. “난 이방인으로 여기에 왔고 다시 이방인으로 여기를 떠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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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현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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