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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칼럼

독서의 재발견

각종 책을 보고 있는 의사와 환자들


넉 달 전 외국 학술회의에 갈 때 책방에 들러 시드니 쉘던을 고를까 무라카미 하루키를 고를까 고민하다가 손에 든 가방에서 다른 책이 만져졌다.
출발 전 날 일주일 외국 가는데 요즘 재미있는 책 읽은 것 있느냐고 공익근무중인 아들에게 물었다. 조금 있다가 아들녀석이 아무 말없이 책상 위에 고구려를 놓아두었다.

고구려라는 제목은 초등학생 시절 재미있게 읽었던 역사이야기를 떠오르게 하였다. 주몽, 유리, 미천왕, 낙랑공주, 광개토대왕, 을지문덕, 연개소문이 뇌리에 떠오른다. 몇 번 읽었던 호동왕자와 낙랑공주에 등장하던 자명고를, 아들은 잠 깨우는 시계(Alarm Clock)로 번역하여 이해했던 사실을 기억하는지 물어보아야겠다.

들고 타는 손가방에 넣어두었던 얇은 책이 있어 꺼내보니 선배가 준 한국수필집이었다. 갑자기 비행기를 타야 하는 열 시간이 짧아질 지도 모른다는 즐거운 느낌에 착석하자마자 읽기 시작하였다. 어느 틈에 식사를 준다고 하여 비빔밥을 달라고 부탁하였다. 나물을 넣고 먹으라는 승무원의 장황한 설명에 “비빔밥 먹을 줄 알아요.”라고 소리치려다 수필 읽는 즐거움을 벗어나지 않으려고 참았다.

소소한 생활이야기를 색깔 있는 필치로 묘사하고 수필가로 등단한 선배의 감정을 공감한 것 같아 미소가 절로 지어졌다. 그런데 비빔밥에 어두운 색깔의 채소가 들어있길래 먼저 맛을 보니 느낌이 괜찮아서 식사가 즐거웠다. 기내식도 이 삼년 만에 변하고 발전하는구나.

화면을 보니 두 시간 뒤 착륙한다고 한다. 두 세시간 잤던 모양이다. 가방에서 인쇄한 포스터를 꺼내 한번 보고 발표할 내용과 가상 질문에 대한 대답을 웅얼거리며 내렸다. 오랜만에 비행기 안에서 한국수필집도 읽고 고구려도 읽고 나니 바이러스, 내성세균, 폐렴에서 한참이나 거리를 둔 세상에 발을 들인 느낌이다. 눈이 뻑뻑하고 부드럽지 않은 것은 시차 탓이려니 생각하자 머릿속은 환해졌다.

‘콜로라도의 달 밝은 밤은...’을 흥얼거리며 방으로 들어서는데 다음 구절의 가사는 생각이 나지 않는다. ‘포터에게 팁을 주어야지’하는 생각이 들어 일상적 사고는 돌아왔다는 안도감에 즐거웠다. 귀국하는 길에 못 다 본 책도 완파하니 즐거웠다.

간농양에서 회복된 환자가 서예를 했었다며 외래에 와 주고 간, 자신이 추사체로 쓴 죽로지실(竹爐之室)을 액자에 넣고 보니, 대나무로 싼 화로는 없지만 따뜻한 차 한 잔 마실 수 있는 내 방이 있어 즐겁다.

오랜만에 병원에 온 고등학교 친구가 불쑥 찾아와 미안하다며 유방암 말기로 입원한 누이 걱정을 하기에 종양내과 주치의에게 들었던 사실대로 인생의 기승전결 중에서 결에 가까웠음을 설명해 주었다. 모니터에 뜬 방사선, CT 스캔을 보여주고 검사소견도 좋지 않다는 결과를 보여주었다. 헤어지면서 나에게 “돋보기도 끼지 않고 차트 잘 읽는 걸 보니 눈이 아직 괜찮네.”하는 이야기도 즐겁게 들렸다.

한국수필집, 고구려를 읽는 즐거움은 중동 코로나바이러스 대책 회의에 참석하기 위하여 전문잡지를 읽을 때와는 또 다른 즐거움이 있다. 나에게 사소한 생활의 즐거움을 느끼게 하여 미소를 짓게 한 선배가 있고, 고구려를 읽으라고 권해 준 아들이 있기에 오늘도 나는 공자님보다 더 즐거운 생활을 누리고 있다.
깊어가는 가을 밤, 우리 병원 직원들도 읽으며 느끼는 즐거움을 경험해 보았으면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