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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칼럼

금녀의 방, 사랑이 꽃피다

저자 : 윤정화

 

서울아산병원 신관 지하 2층, 작은 방

 

그 방에 여자가 들어온 적은 한 번도 없다고 했다. 사전 방문 고지를 했음에도 필자는 문 앞에서 공연히 헛기침이 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서자 천장까지 닿아있는 신발장과 바닥에는 남자 신발만 한 가득이다. 남자들끼리 모여 있으면 발산하는 특유의 향기(?)가 살짝 코를 찌른다. 어른 키만 한 관물대가 네 개의 벽을 빈틈없이 둘러싸고 있다. 마치 군대 내무반 같다.

 

방주인은 어림잡아 삼 십 여명. 이 가운데 부모님의 짐을 덜어드리려 아침 잠 뿌리치고 뛰어오는 착한 아들 열다섯 명이 있다. 고객 주차장이 있는 신관과 후문 주차장에서 빨간 모자를 쓰고 출입 차량의 안전한 주차를 유도하는 아르바이트생들이다. 금녀(禁女)의 방은 이들의 유일한 쉼터다. 마침 업무가 끝나는 오후 4시가 조금 지난 시각, 일을 끝낸 그들이 하나 둘씩 모여들었다.


 

이 방 관물대에 뭔가 특별한 것이 있다.

 

그 ‘특별한 것’을 보여 달라고 부탁했다. 갑자기 등장한 아줌마에게 청년들은 귀여운 친절을 베풀면서도 필자의 부탁에 조건을 붙였다. ‘비밀장소’를 누구에게도 알려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신신당부 끝에 그들만의 약속된 장소에서 꺼내온 것은, 다름 아닌 돼지 저금통! 살 찐 놈도 아니다. 몇 년 전 대통령을 만든 복돼지라고 호사를 누렸던 작은 돼지 저금통이다. 천 원짜리 몇 장과 동전들이 담겨 있다.

 

매월 급여가 나오는 날, 저금통을 채운 후 대외협력실에 갖다 준다고 했다. 이들의 선행이 시작된 것은 올해 1월부터. 5월 13일에도 대외협력실에 어김없이 그들이 나타났다. 세 명의 청년은 이렇다 저렇다 말도 없이 담당자 책상 위에 돼지 저금통을 놓고 바람처럼 사라졌다.

이달 모은 금액은 41,260원, 지금까지 기부한 금액은 모두 212,110원이다.

 

 

돼지야, 돼지야, 넌 무얼 먹고 사니?

 

지난 연말 회식 자리에서 맏형격인 주차관제실 박우식 주임은 한 가지 제안을 한다. 한 달에 한번 하는 과자 파티 경비를 모아 기부하자는 것이다. 지각 한 번 할 때마다 천 원씩 벌금을 내서 그것도 기부하자고 했다. 아르바이트 인원이 정해져 있기 때문에 지각을 하면 잠깐 동안이라도 다른 친구가 일을 두 배로 해야 한다. 그런데 아침 잠 많은 청춘들이라 지각하는 사람이 꼭 있었다. 동료들끼리 툴툴거리며 하루 일을 시작하는 것이 고객들에게 좋을 리 없었다. 

 

그래서 생각해낸 아이디어였다. 지각한 친구들이 벌금을 내는 대신 다른 친구들이 일을 조금 더 하고, 모은 돈으로는 아프고 가난한 사람을 도와주자는 것. 그런 경험을 해보면 주차장에서 환자와 보호자를 대할 때 마음으로 만날 거라는 기대도 있었다. 돼지 저금통은 문구점을 하는 한 청년이 12개를 기부했다. 그 자리에 있던 모두가 찬성했고, 박주임 역시 강제성은 없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자발적 벌금이 즐겁기까지야 했겠는가?

 

그런데 첫 저금통을 전달 한 후, 청년들의 진심을 깨우는 사소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2월, 대외협력실은 한 달에 한 번 직원 후원금 전달식 사진을 찍는 자리에 청년들을 부르기로 했다. 참석 요청 공문에는 후원금을 받는 환자의 병력을 설명한 내용도 포함돼 있었다. 홀어머니가 키우는 심장병 걸린 딸, 나이는 열아홉 살…, 누가 시키지 않았는데도 청년들은 후원을 받게 될 환자의 사연을 금녀의 방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붙여놓았다. 

 

오며가며 한 번 씩 읽었다. 공연히 웃음도 헤퍼졌다. 자발적 벌금만이 아니라, 돈을 넣는 이유도 다양해졌다. 차들이 말을 잘 들어줘서 천 원, 중증 장애아를 데려온 어머니가 존경스러워서 천 원, 그냥 기분 좋아서 천 원, 일 끝내고 캔 음료수 뽑아먹던 동전도 털어 넣기 시작했다. 그리고 중요한 또 한 가지, 자신들의 작은 정성을 생명으로 돌려주는 서울아산병원이 정말 고마웠다.
 


아름다운 청년들, 착한 전통을 만들다.

 

한 달 아르바이트로 그들이 받는 돈은 80만 원이 조금 넘는다. 등록금 모아 복학할 날 기다리며 한 푼도 허투루 쓰지 않는다. 누군가에게 천 원 한 장은 적지 않은 돈일 수도 있다. 지각하는 사람이 없어서, 즐거운 일이 없어서 돈이 모이지 않으면 어떡하느냐고 물었다. 그들의 대답은 다부지고 유쾌하다.


  “기부는 약속입니다. 빈 저금통이라도 매달 가져다 드릴 겁니다. 새로 들어오는 아르바이트 학생들에게도 선배들의 거룩한 전통을 계속 이어가게 할 겁니다. 진짜 기분 좋거든요.. 음~하하하…”

 

내가 행복하지 않으면 세상은 행복해지지 않는다. 작은 돼지 저금통을 통해 청년들은 지금 그 소중한 지혜를 배우고 있는 듯 했다. 누구나 아름다운 충동을 느낀다. 나누면서 살고 싶다는 충동. 하지만, 실천으로 옮기는 ‘누구나’는 많지 않다. 그래서 청춘의 가난한 주머니에서 나온 후원금이 더 고맙고 감사하다. 땀 흘릴 줄 알고 기쁘게 나눌 줄 아는 청년들, 그들이 만들 대한민국을 그려보는 것은 흐뭇하기까지 하다.

 

금녀의 방에 들른 날, 20대 청춘의 풋풋하고 따뜻한 기운을 듬뿍 받고 퇴근한 필자는 열네 살 딸아이를 붙잡고 장한 청년들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한참동안 참을성 있게 엄마의 수다를 들어주던 딸의 반응이 대박이다.


  “서울아산병원은 아르바이트 학생도 그렇게 착해요? 와~ 짱이다!”

마지막 한마디 더. 서울아산병원이 추구하는 가치 ‘ASAN SPIRIT’의 ‘R(responsibility)’의 실천 전략은 ‘사랑과 나눔’이다.

ASAN SPIRIT은 신관 지하 2층 관물대에도 있다. 당신에겐 어디에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