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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디컬칼럼

에밍 졸라,지식인의 용기

1884년, 군사 기밀이 독일로 새어나가고 있는 것을 감지한 프랑스 정보 당국자들은 군부 내에 침투한 스파이를 잡기 위하여 혼신의 힘을 기울인다. 장교들을 조사하는 과정에서 육군 참모본부에 근무하고 있는 ‘알프레드 드레퓌스’ 대위가 유태인이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유력한 용의자 선상에 오른다.

 

스파이를 찾기 위하여 골머리를 앓고 있던 프랑스 정보부는 안성맞춤인 범인을 찾아낸 셈이고, 군부 고위층도 유태인을 진범으로 모는 것이 누구에게도 부담이 없고 여러 모로 편하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드레퓌스는 즉각 체포되었고 육군사관학교 후배들이 보는 앞에서 공개적으로 대위 견장이 뜯겨지는 모욕을 당한 후 구금되었다.

 

프랑스 신문들은 “유태인이 국가 기밀을 독일에 팔아먹었다” 라는 제하의 기사를 연일 대대적으로 보도하였고, 국민들은 흥분하여 유태인을 프랑스에서 추방해야 한다고 시위를 벌였다. 드레퓌스의 결백 주장은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종신형을 선고 받아 프랑스에서 가장 가혹한 유형지인 ‘악마의 섬’ 감옥에 수감되었다.

 

18개월의 세월이 흘렀고 사건은 거의 잊혀졌다. 하지만 그 동안, 착실하고 모범적인 드레퓌스 대위가 범인일 가능성이 적다고 생각했던 몇몇 측근 장교들이 비공식적인 조사를 벌인 결과 정보 유출 사건의 진범이 따로 있음이 밝혀졌다. 귀족 출신 아가씨와 결혼 후 돈 씀씀이가 커져 빚을 많이 지고 있던 ‘페르디낭 에스터하지’ 소령이 독일에 정보를 팔아먹은 진범이었던 것이다.

 

당연히 재수사 요구가 이어졌다. 하지만 군 고위층은 강한 거부감을 보였다. 국민과 언론들 어느 누구도 재판 결과에 불만이 없다는 것이 거부의 이유였다. 군부의 명예를 지키기 위해서도 재수사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군부와 프랑스 정부는 에스터하지 소령을 무혐의 처리한 후 드레퓌스를 감옥에 그대로 두기로 결정하였다.

 

1888년 유명 작가인 에밀 졸라는 파리의 일간지‘로로르(L’AURORE)’에“나는 규탄한다”라는 성명을 기고하였다.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한 개인에게 억울한 누명을 씌운 군부와 정부 당국을 규탄한 것이다. 그러나 프랑스 정부는 꿈쩍도 하지 않았고, 오히려 졸라를 비방죄와 명예훼손죄로 몰아 재판에 회부했다. 졸라의 성명서에 흥분한 사람들은 공판장에 몰려와 졸라를 감옥에 보내라고 아우성쳤고, 유죄 판결을 받은 졸라는 신변의 위험을 느껴 영국으로 망명하였다.

 

프랑스 국민들이 졸라의 허수아비 화형식을 열고 반역죄로 다스리라고 난리를 치는 와중에, 영국에서는 졸라의 진짜 장례식이 열렸다. 망명 중 졸라가 사망한 것이다. 졸라의 죽음을 계기로 전 유럽이 들끓기 시작했고 프랑스 내 여론도 둘로 갈렸다. 결국 1902년 7월 프랑스 대법원은 재심에 착수했고 드레퓌스는 무죄 판결을 받고 석방된다. 그는 열악한 환경에서 오랜 수감생활로 노인처럼 변해있었다. 군대로 복귀한 그는 제1차 세계대전에 대령으로 참전하여 무공훈장을 받았고, 1935년 죽었다. 이상(以上)이 드레퓌스 사건의 개요이다. (참조 :“ 갈등의 핵, 유태인”김종빈 著, 2001년, 효형 출판)

 

언론의 왜곡된 보도, 쉽게 흥분하는 대중들, 자기와 의견이 다르면 모두 악(惡)이라고 적대적 태도와 폭력 성향을 보이는 사람들, 드레퓌스 사건 때 파리 시민들의 광기 어린 모습이다. 하지만 1세기도 더 지난 지금, 웬일인지 우리들에게 그다지 낯설지않고 오히려 익숙한 느낌이 든다.

 

누구도 제어하기 힘든 상황에서 에밀 졸라는 안위(安危)를 걱정하지 않고 과감히 나섰다. 이 사건은 유태인 인종 차별 때문에 드레퓌스 개인이 억울하게 옥살이를 한 단순한 사건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다. 하지만 대중들의 광기, 불의에 맞선 에밀 졸라의 항거 등 중요한 사회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 사건이다. 또한 지식인 한 사람의 양심적 행동이 세상을 바꿀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이기도 하다.

 

19세기 말 당시 천덕꾸러기였던 유태인이 부당한 처사를 받는 것은 다반사였다. 그러나 졸라에게 드레퓌스 사건은 단순한 인종 차별의 문제가 아니었다. 거대한 조직의 음모와 부당한 처사, 힘없는 개인의 파멸…, 한 마디로 불의(??義)에 맞서는 문제였던 것 이다. 주변에 무모하다고 만류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고, 공연히 쓸데없는 짓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졸라는 자신이 옳다고 판단한 일을 위하여 목숨을 걸고 과감하게 나섰다. 용기 있는 지식인의 전형을 볼 수 있다.

 

우리 사회가 제 자리를 잡지 못하고 계속 시끄러운 원인을 정부나 통치자의 리더십에서 찾는 사람들이 많다. 하지만 우리들 각자에게는 책임이 없는 것일까? 자신의 책임은 망각하고 남의 탓만 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사회 각 분야에서 에밀 졸라와 같이, 대중들의 잘못된 믿음과 그릇된 여론에 과감히 맞서 진실을 밝히는 지식인들이 많이 나타나야 할 텐데 그렇지 못해서 아쉽다. 왜 공연히 나서서 몸과 마음 피곤한 쓸데없는 일을 자초하느냐고 비웃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런 사람들에게는 히틀러 치하에서 나치의 죄악에 침묵했던 어느 목사님의 뒤늦은 탄식이 시사하는 바가 클 것이다.

 

“히틀러가 유태인을 공격했을 때, 나는 유태인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 히틀러가 가톨릭을 공격했을 때, 나는 가톨릭 신자가 아니었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 히틀러가 노동조합을 공격했을 때 나는 조합원이 아니었다. 그래서 관심이 없었다.그리고 히틀러는 프로테스탄트 교회를 공격했다. 이제 그 일을 걱정해 줄 사람은 아무도 남아 있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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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춘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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